발도르프 학교 환경교육의 단초

정기간행물 행동하는정신 17호 (2012년)
기사입력 2018.04.17 10:25 조회수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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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 학교 환경교육의 단초

 

안드레아스 주흐안트케 Andreas Suchantke 비텐아넨 발도르프 사범대학 교수

번역 이정희 독어독문학 박사, 인지학센터 대표

 

발도르프 교육의 교수법에서 주력하는 특징점은 늘 학생의 나이에 따라 보이는 특별한 발달 상황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저학년의 아이들은 성장하는 사람들과 구분되기 때문에, 인지능력에서 뿐 아니라, 특히 환경을 체험하는 것과 관련한 방법론이 고학년의 교수법과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아이에 알맞게이루어져야 한다.

처음 저학년에서는 모든 학습 내용이 정서적으로 강하게 다가와야 하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이 내용들은 나중에 고학년이 되어 관련 주제들과 함께 학문적이고 실제적으로 접근하는데 풍요롭게 하는 기본 토대를 마련하는데, 무엇보다 환경 내용은 훗날 윤리적 태도를 결정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며, 동시에 발도르프교육의 독특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다음 설명에서 특별히 상세하게 다루어 본다. 그렇다고 이것이 과학적 교육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환경에 대하여 부모가 말하는 자세와 관점에 의해 강도 높은 인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폭 넒은 영역에서 환경 위기에 대한 무관심, 둔감성, 억누름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일상의 끔직한 뉴스들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적극적인 참여는 다만 소수에게만 해당한다. 게다가 이 시대적 생활양식의 결과로 아이들 대부분이 자연과 멀리 있다. 일반적으로 자동차를 타고 자연을 스쳐 지나가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자연을 체험한다. 그런데 아이 주변의 자연 환경은 이런 방송들에서 주목하는 장면들과 동떨어져 있으므로, 아이에게 아무것도 다가오는 것이 없고 지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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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환경 교육의 단서에 대한 전제들은 현재 유리한 편이 아니다. 하나의 전형적 예시가 이것을 명백히 설명해주고 있다: 초보 발도르프 교사가 독일의 어느 대도시에서 1학년을 처음 맡았는데, 아동들이 거칠고 혼란해서 완전히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젊은 담임교사는 아이들이 아침 걸음걸이에서 보이는 다듬어지지 않은 움직임을 진정시켜 보려 했다. 그런데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많은 아동에게 식물과 작은 짐승들에 대한 적대심이 감돌고 있었다. 이들의 내적 자세를 이렇게 서술할 수 있다: 내쫓아 몰아내기, 짓밟기, 밟아 부수기.”

 

 물론 적지 않은 아동 청소년들이 환경 보호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각 단체에서 청소년 그룹이 자연보호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한다. 이때 다양한 새를 관찰하고, 인공 새둥지도 가져다 놓는 일 등을 하며-, 규모가 큰 자연보호 단체들은 청소년들의 커다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들은 아주 다양한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이런 방향에 참여하는 인원수는 소수에 불과하다.

 

이와 연결하여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많은 청소년과 아동의 내적 자세를 계발하는데 도움을 주고 보살펴 주려면, 학교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전제들은 단순하지 않음을 언급한 예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시대적 요구가 첫째 순위이고 동시에 커다란 기회로써 중요하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단행해 보아야 한다.

 

발도르프 교육과 그 기여의 시각에서 질문을 던지기 전에, 환경보호와 예방의 두 가지 서로 다른 발단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것은 환경교육의 관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 인지학적 동기는 사람의 삶의 질에 방향을 두어 환경에 적정한 기술들, 예컨대 공해물질의 절감, 대체 에너지 찾기, 쓰레기 줄이기, 독소 없는 농업 등, 환경피해들을 제한하고 줄이기를 시도한다.

 - 생태적 또는 생명 중심적 발단은 자연 자체 쪽으로 향해있다. 고래 또는 위협받고 있는 다른 동물의 종이나 식물의 종이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자연의 생태체 등을 보호하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이용가치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두 방향은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 있고 긴밀하게 상호보완된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 접근 방법은 결국, 항상 회복하기와 증상의 치유에만 머문다. 그 이유는 땅의 생명, 숲 등 자연의 생명 조건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임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지하자원의 저장고이며, 미래에는 좀 더 머리를 써서 접근해야한다는 입장이다. 이전부터 그래왔는데, 이것은 근본적인 숙고를 하지 않은 부분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건강한 생명 환경 안에서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람이 자연 고유의 법칙성과 요구들을 존중할 때 주어질 수 있다. 이런 입장은 완전히 생태 중심적 동기부여 뿐 아니라 다른 강점도 지닌다. , 대부분의 청소년에게 열려있고 잠재되어 있는 이상주의에 호소하여 -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 나아가 불이익을 당하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형제를 위해, 주변의 피조물을 위해 동참할 가능성을 가진다.

 

생태중심의 환경보호는 감성을 움직인다. 이 분야에서 온 힘을 다하여 좋은 일을 위해 전투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인물들에서부터 출발하여, 많은 젊은이들에게 강렬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린피스의 환경운동가들은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영웅들이다. 여기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배경을 나란히 두고 보면 흥미로운 점을 찾을 수 있다: 착취당하던 노예 계층, 자신의 몸과 산업노동자 층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발전되었던 사회적 양심이 사회를 넘어서 오늘날 자연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런 발전을 위해 모든 수단을 써서 계발하는 것이 교육의 중심 과제가 되었고, 무엇보다 여기서 실제 학생들에게 도달하기 위해 어떤 동기부여를 주어야 하는 기회가 되었다. 인류 중심적으로 방향을 둔 환경교육 하나만으로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랑에하이네Langeheine와 레만Lehmann의 연구에서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분명 환경교육을 통해 지식의 수준은 끌어올릴 수 있으나, 환경 보호에 관한 관심을 일으키고 행동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방식의 의도적인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 채 수동적인 참고 지식으로만 머물 뿐이다.

 

아동과 청소년을 자연으로 데려가기   

 

 

학생들이 동물과 식물에 대하여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던 교사의 체험들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자. 이 교사는 자기 반 아이들이 생명체에 다르게 접근할 방법을 찾다, 동물과 식물에 대한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학문적 사실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의미가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한 시적인 방식으로, 나뭇잎 끝에 맺힌 빗방울이 보고 있는 모든 것들, 주위의 온 세상, 하늘과 별, 거기에 비추어지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개미와 달팽이가 만나, 개미가 달팽이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이 점점 귀 기울이기 시작했고 다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했.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밖에서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달팽이를 보면 밟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길가로 치워주었다. 이야기를 통해 자연, 식물과 동물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연결이 생겨난 것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발전되었다. 자연을 아끼고 좋아하는 것이 한 해를 지나며 깊어지고 확장되었다; 물이 흐르는 숲 속의 어느 곳을 늘 다시 찾으며, 일 년 내내 많은 것을 관찰했다. “이어서 이곳은 우리 길이 되었고, 우리 시냇물, 우리 나무, 그리고 우리 숲속이 되었고, 우리의 다람쥐와 우리 새가 되었다. 여름에 작은 시냇물이 마르면, 아이들은 슬퍼하고 마음을 쓰며 (<대체 우리 물이 어디로 가 버린 거지?>, 물을 퍼다 부어주려고까지 했다. 게다가 이런 가뭄의 원인을 알아내려는 내적 열망을 보이며 그것을 찾아냈다.” 이런 관찰들은 처음 생각의 자극을 주었고, 진정으로 탐구하는 내적 자세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식물과 동물에 대한 관계, 사랑과 관심이 생겨났다. 그러나 만약 감성의 차원이 소홀해지면, 대상과 아무런 연결이 생겨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역점을 두어 이성 차원만 요구하거나 이 부분을 너무 이르게 건드리면, 대상에 대한 감정적 연결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방법은 책임을 갖는 윤리성을 발달시키는데 부적절하다.

 

 침묵의 봄이라는 획기적인 책의 저자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고맙게도 무엇보다 어린 아이들의 부모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이의 내면에 경탄의 천성이 살아있게 하려면, 이런 능력을 아이와 나눌 수 있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아이에게 필요합니다. 즉 어른이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의 기적과 놀라움과 기쁨을 아이와 함께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하기 쉬운 질문, “나는 새 종류를 구분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에게 자연에 대해 뭔가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확실한 것은 아이를 지도하는 부모에게 무엇으로 이끄려는 지식이 오히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식적 앎을 아이의 훗날에 일어나는 통찰과 인식을 성숙하게 해주는 씨앗으로 설명한다면, 감성과 느낌, 그리고 감각의 인상들은 그 씨앗이 싹 틀 수 있도록 필요한 비옥한 토양에 해당됩니다. 유아기의 시간은 토양을 준비하는 시기에 해당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새로움과 모르는 것을 자극하는 감각, 호감과 경탄, 그리고 사람에 대한 정서 같은 감성이 한번 일깨워지면, 우리의 대상에 대한 앎이나 지식에 대한 요구가 감성에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한번 생겨나면 지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저학년에서 자연에 대한 감성적 접근

 

 

앞에서 교사가 접근한 방식은 발도르프 학교에서 실천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발달심리학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고려하여 그것을 토대로 적용한 것이다. 그래서 유아기와 저학년의 아이들은 실제를 청소년이나 성인과 다르게 체험한다. 교수법에서 나이의 특성으로 차이를 두는 방법론은, 비록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전되었음에도, 피아제 학파의 연구결과와 상당 부분 일맥상통한다.

 9-10세까지 아동의 체험세계는 청소년과 성인의 체험세계와 같이 사물적이지 않고 애니 즘적이다. 아이는 모든 것을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것으로 체험하기 때문에, “사물”, “대상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나무와 달, 돌은 자신처럼 느'끼고, 감정을 가진 존재로 여긴다. 또한 이런 존재들은 아이와 따로 떨어져 독립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아이와 연결되어 있다. (저녁 산책길에 달님이 하늘에서 함께 걷는다. 달님은 아이가 가는 곳을 알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따라다닌다.) 이런 생각은 아이가 세상에 대해 자신이 중심에 서있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동질의 존재들이 하나의 통일체로 닫혀있는 상을 가진 결과이다. 아이는 여전히 자기에게 속한 세상, 자기를 향한 세상 안에 들어있다. 아이는 아직 소외를 모른다. 자연히 이 모든 것이 고도로 기술화된 현대의 정보세계의 영향에 의해 크거나 작은 강도로 간섭당하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실제적인 잠식과 묻힘이 아이들의 체험 방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 문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앞서 서술한 교사의 체험에 나타난다. 교육자가 잘못하지 않고 그것에 확신하는 경우 모든 것이 가능하다. 

 너무 이른 인지적-추상적, “과학적수업방법은 현대 사회의 이런 경향, 즉 아이가 친근하고 친숙하게 체험한 세상에서 너무 일찍 떨어져 나와 분리되는 경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분리는 저학년을 보내며 일반 개념을 형성하고 조작과 인과 관계의 사고 능력이 깨어남에 따라 저절로 일어난다. 이런 발달 과정을 인위적으로 앞당기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애니 즘의 단계가 온전하게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서서히 가라앉게 되면, 막 분리가 시작될 때 주변 환경이나 자연과 스스로 친숙한 감성의 기본 분위기에 머물게 되어, 인지적이고 행동지향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관심을 갖는 기본 전제가 된다.

 이 연령의 아이들을 맡은 저학년 학교교사(그리고 유아교사)는 자연 현상들을 이에 적합한 방법으로 아이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때 이 나이대의 다른 능력을 고려하여 판타지 능력을 쌓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이야기, 동화 등의 내적 상들이 비유적이고, 유연하고 생동감 있게 강하게 체험되도록 한다. 아이는 체험된 것을 생각하며 마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받아들인다. 아이에게 이런 내적 그림들은 실제로 사물의 외부 세계보다 좀 더 높은 특성을 지닌다

[김송미 기자 ssami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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