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적 지혜에 비추어 본 예술

정기간행물 행동하는정신 21호 (2016년)
기사입력 2018.04.24 11:05 조회수 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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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적 지혜에 비추어 본 예술 

 

Rudolf Steiner

번역 여상훈 | 루돌프슈타이너 전집발간위원장

 

강연 1 (GA275)

19141228, 스위스 도르나흐

 

<기술과 예술>

다니엘모로 엽서 (2).jpg

여기서 제가 행한 강연들의 주된 목적은 정신과학의 인식과 오늘날 요구되는 삶에 관한 이해 사이를 잇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 주제를 두고 몇 가지 견해를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현대 생활이라고 불리는 것은, 도시적인 삶 또는 그와 관련된 생활 속에서 자연과의 직접적인 연계를 잃어버리게 된 사람들이 생생하게 겪고 있는 삶으로 보입니다. 현대의 삶이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그런 삶이 인류의 물질적인 문화와 정신적인 문화의 진보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정신과학(=인지학)이 우리에게 주는 자극이라고 여기는 내용이 현대적 삶 속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 우리의 생활에 등장하는 것들에 맞서 어느 정도 균형을 잡으려면 우리는 정신과학이 꼭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정신적이고 신적인 생명의 힘들을 약화하고 파괴하는 현대 생활의 내용을, 인지학이 어느 정도 상쇄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이른바 정신계 입문의 초기 단계들을 지나가면서 삶의 연결고리 안에서 현대 문명의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영향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삶에 대해 현대 생활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르쳐주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정신성이 아닌 것에 의해 인도되는 외형적인 삶의 관찰은 그 경험만큼 깊은 가르침을 주지는 못합니다. 영계입문의 첫 단계에 들어선 사람은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기차나 배 안에서 하룻밤을 지낼 때 하게 되는 경험과 유사합니다. 영계입문 삶의 첫 단계에 들어선 사람과 그런 입문에 연관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 전자는 선박이나 기차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지내는 동안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체험을 자각합니다. 입문을 통해 그 영향을 알게 된 사람과 똑같이, 입문이 아닌 다른 경로로 그 영향을 알게 된 사람도 당연히 그런 체험이 사람의 유기체에 미치는 전체적인 영향을 압니다. 사람의 본성에 미치는 전체적인 영향은 당연히 차이는 없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신과학적인 사실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잠을 자는 동안 우리는 자아와 아스트랄체와 함께 우리의 물질체와 에테르체 바깥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주 법칙이 자연스레 우리에게 명한 제약들로 인해, 우리는 사실상 먼저 우리의 자아와 아스트랄체과 함께 특히 물질체와 에테르체에 직접적으로 가까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서 잠을 잘 때, 우리는 사실상 자아와 아스트랄체과 함께 기차의 바퀴를 비롯한 기계장치가 일으키는 그 모든 제동과 진동과 굉음을 오롯이 겪게 됩니다. 최신형의 증기선박에 타도 그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느 경우에나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것의 한가운데에 존재합니다. 음악적이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을 체험하면서도, 우리는 온전히 그 안에 머물게 있는 것입니다. 정신계 입문의 맨 첫 단계에라도 진입한 사람이면, 물질체와 에테르체 안으로 자아가 어떻게 아스트랄체를 동반하고 돌아오는지를, 잠에서 깨기 직전에 기계의 압박을 통해 겪고 체험한 것이 무엇인지, 자아와 아스트랄체가 잠에서 깨어날 때 느끼게 됩니다.

 조화롭지 못한 이 모든 짓누름과 잡아당김을 우리는 물질체와 에테르체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선박과 기차의 기계음이 아스트랄체와 자아에 남긴 여운과 함께 잠에서 깬 적이 있고, 그 여운을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자각해본 사람은, 물질체와 에테르체의 내적인 법칙성으로 부터 자신이 깨어 있는 상태와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자아 및 아스트랄체의 체험 같은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압니다. 우리가 자각하는 것은 실제로 엄청난 무질서, 가장 난폭한 굉음, 파열, 찢어지고 부서지는 소리로써,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이 에테르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대충 비교해도 여러분은 제대로 이해하시리라고 생각되는데, 물질체에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르게는 우리의 에테르체에 영향을 미쳐서, 기계 안에서 짓이겨지고 부서지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이런 것은 현대 생활에서 피할 수 없이 동반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저는 처음부터 아예 경고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제가 우려하는 그런 충돌은 자칫 신지학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숨겨진 오만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숨겨진 오만함은 여기저기서 이미 충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저의 이런 말에는 구체적인 것은 고사하고 그 어떤 포괄적인 암시는 없습니다. 오늘날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든 판단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언급한 신지학 추종자들이 오만해지는 경우에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파괴적인 힘들로부터 나의 몸을 단단히 지켜야 해. 현대 생활의 이 모든 영향에서 나를 단단히 지켜야 해. 제대로 된 환경의 작은 방 안에, 신지학에서 권할 법한 색으로 꾸민 벽의 방 안에 나를 꽁꽁 가두어서, 그 어떤 것도, 특히 현대 생활이 가져다주는 것이 내 신체의 조직기관에 닿지 못하도록 지켜야 해.”

 저는 제가 겪는 충돌로 인한 영향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어서, 우주 카르마로 인해 우리에게로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그 모든 영향을 피해 자신을 지키려는 행동은 허약함에서 기인합니다. 그와는 달리 유일하게 인지학은 사람의 심성을 강하게 만들 수 있으며, 그런 영향들로부터 우리의 내면을 무장하고 강화하는 힘을 계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 활동하는 장에서는 현대 생활로부터 움츠러들기를 권고하고 정신생활을 가두는 일종의 온실 문화를 만들기를 권고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진정한 정신문화라는 토양에서 일어날 일은 결코 아닙니다. 약질인 사람들은 현대 생활에서 도망쳐서 그런 생활의 영향을 받지 않을 이러저러한 장소로 물러나게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결국 그런 태도는 영혼이 강하지 못하고, 약한 탓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그런 후퇴가 아니라 정신과학과 정신 연구에서 얻는 힘으로 자기 자신을 관철시킴으로써, 현대 생활의 영향을 막을 수 있게 영혼을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외부의 방해와 공격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아리만의 영들(ahrimanische Geister)의 방해와 공격을 뚫고 정신적 신성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전에 제가 자주 언급했던 것, 한 가지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사람은 밤에만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낮에도 잡니다. 낮에 자는 잠은 밤잠처럼 그렇게 잘 인식하지 않을 따름입니다. 밤이 되면 사람의 사고 활동은 흐려집니다. 그리고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의 사고 안에서 살아가므로, 사고 활동이 흐려지는 것을 더 잘 인식하는 것은 당연히 밤에 잠을 자는 동안입니다. 낮에 쉬는 것은 오히려 의지생명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의지에 기대는 비중이 작으므로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중의 하나로 철학자들은 의지의 자유와 부자유를 두고 갑론을박합니다. 철학자들은 낮에 잠을 자면서 의지를 연구하는 탓에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의지의 자유와 부자유, 결정론과 비결정론을 두고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실제로 날마다 갖가지 일상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의지생명을 거의 자각하지 못합니다. 의지생명은 잠재의식 안으로 가라앉아 있으며, 잠재의식은 순전히 아스트랄체에 속하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있는 낮에도 우리를 둘러싼 현대 생활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현대적 기술문명의 그 모든 압박과 충격을 경험합니다. 밤이 되면 우리는 감정생명과 사고생명 쪽에 더 많이 그런 압박과 충격을 받으며, 낮에는 의지생명과 감정생명 편이 더 많이 압박과 충격에 더 빠져듭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현대 생활이라고 일컫는 것이 인류의 발달과정에 늘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후기 아틀란티스 제5문화기가 시작한 뒤입니다. 후기 아틀란티스 제5문화기의 시작과 함께 이 현대 생활도 시작된 셈입니다. 외적인 정신문명은 이 현대 생활의 등장에 대해 어떻게 말하나요? 잘 아시다시피, 현대의 정신문화는 이 현대 생활과 함께 이루어 놓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고대와 중세 전 시기를 통해 인간은 자연을 제대로 관찰하는 능력을 계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자연 관찰에 바탕을 둔 자연과학이 나오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자연과학이 나왔다.” 근대를 이렇게 말하는 경우에는 후기 아틀란티스 문화기의 시작과 맞아떨어집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옛날의 자연관찰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추상적인 법칙성을 바탕으로 자연을 관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자연과학도 흔히 말하는 전대미문의 방식으로자연법칙을 체험함으로써 자연의 힘을 인간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적 기술이며, 그런 현대적 기술의 모체는 사람이 자연법칙을 알게 되고 그 자연법칙에 따라 물질을 기계로 만든 것입니다. 그 기계를 자연과 생활에 사용하여 현대 생활을 기계에 의존하도록 꾸며 기술이 지배하는 환경을 만든 것이, 바로 우리를 둘러싼 현대 생활과 그로써 만들어지는 모든 것의 바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근대야말로 진정한 자연과학의 토대를 놓았고 그와 함께 자연과 그 힘들을 확실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라고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것을 아주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리만의 언어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리만의 언어로 말했으니까요. 이제 우리는 그 아리만의 언어를 참된 언어로 옮겨보아야 합니다. 참된 언어를 통해 다시 정신과학을 배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외적 자연을 관찰하여 얻은 의미만 부여된 단어들이 아니라 우주를 전체로, 즉 그 본질과 정신생명을 포함하여 관찰할 때 부여되는 단어들을 통해서 정신과학을 배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기술을 만들어낼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아주 외면적으로만 생각해봅시다. 그 경우의 작업은 두 가지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 단계는 자연의 연결고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바위를 부수어 돌맹이를 만들고, 숲을 망가뜨려 목재를 얻습니다.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자연의 연결고리를 부수고 망가뜨려 자원을 얻어내는 겁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렇게 자연을 망가뜨려 얻은 것을 다시 모아 자연법칙이라고 알게 된 것에 따라 기계를 만드는 것이죠. 우리가 겉으로만 보면, 일은 이렇게 두 단계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그 사안을 내면적으로 보면 어떨까요? 내면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짓부수면, 제일 먼저 광물로서의 자연을 부수면, 이전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광물은 일종의 쾌적감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런 쾌적감은 그 광물속에 정신적인 요소를 느끼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런 것을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일어나는 데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과정에서 자연을 유지해주는 원소영들, 즉 이것도 정신계의 발전된 위계의 영역에 속해있는 것인데, 그 존재들을 자연으로 부터 추방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모든 것에는 원소영의 존재가 있습니다. 자연을 짓부수면서 우리는 자연의 영들을 짓눌러 정신계의 영역에서 쫓아냅니다. 이 과정은 첫 번째 단계와 지속적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자연을 부수고 짓뭉갬으로써 그 자연으로부터 자연의 정신들을 분리시킵니다. 우리는 이 자연의 영들을 야훼 신들에 속하는 영역에서 자기 자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날갯짓을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쫓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첫 번째 단계를 자연 영들의 추방이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자연을 갈갈이 찢고 괴롭혀 얻어낸 자원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자연법칙에 따라, 하나 또는 일련의 기계를 형성하고, 우리가 형태를 만들어 다시 그 안에 어떤 정신적인 본질을 집어넣어 새로운 구조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드는 형성물은 결코 정신이 빠져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정신적 존재를 위한 바탕을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계라는 형태의 형성물 안에 집어넣은 이 정신적 존재는 아리만의 위계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 단계에서 우리는 지속적인 발달 속에 있는 자연 영들을 만나 그것을 추방하고,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기계나 기타 기술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아리만의 영들과 합일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그런 기술로 가득한 근대적 환경 안에 사는 우리에게 이것은 영향을 미칩니다. , 우리는 밤이나 낮에 우리 안에서 자면서, 완전히 하나의 아리만적 환경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입문의 첫 단계에 들어선 사람이 잠에서 깨어날 때, 바깥의 포효와 찢김과 굉음 안에서 그것을 파괴하는 것으로 느끼는데, 즉 자신의 자아와 아스트랄체 속에 있는 그 사람이 물질체와 에테르체 안으로 들어갈 때, 그것을 파괴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이른바 아리만의 원소 영들과 공존한 결과를 자기 유기체 안에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3의 단계로써, 문화의 단계로

[김송미 기자 ssami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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