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대화의 인간학적 이해 1 |글 김훈태

정기간행물 행동하는정신 17호 (2012년)
기사입력 2018.05.10 13:29 조회수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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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대화의 인간학적 이해 1 | 김훈태 전)발도르프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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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마셜 로젠버그에 의해 창시된 비폭력대화(NVC : Nonviolent communication)’는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그 뿌리로 여깁니다. 무장투쟁이 아니라 비폭력-비협조운동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끌어낸 간디의 정신은 대화의 방법에서도 유용합니다. 우리가 조심을 하며 대화한다고 해도 언제든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또 상처를 받을 수 있지요. 우리의 삶이 이미 폭력적이기 때문입니다. 폭력적인 삶의 방식은 특히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에 깊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는 글로 옮겨보면 즉시 알 수 있습니다. (말보다 글이 더 의식적이기 때문에 글쓰기는 자아성찰에 큰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이러한 폭력적인 언어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비폭력대화는 인간의 근본적인 마음의 상태를 연민 또는 자비로 봅니다. 무의식적인 폭력이 가라앉아 고요해진 마음은 본래 자비롭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폭력적인 이유는 우리의 사회가 폭력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이 어지러워서이기도 합니다. 정신없이 바쁘고 스트레스가 쌓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지 못할 때, 우리가 쓰는 언어는 더욱 폭력적이 됩니다. 로젠버그의 비폭력대화는 이러한 언어를 도구로 하여 자기 자신과 상대방의 마음을 관찰하고 느끼며 표현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비폭력대화는 그동안 오로지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요. 연습과 훈련은 물론 필요한 것이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본질적인 원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더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슈타이너의 인지학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비폭력대화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정신이 됩니다. 여기서는 인지학의 인간학을 통해 비폭력대화와 만나보려 합니다.

 

욕구, 권력, 폭력

 

인간은 욕구(욕망)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몸과 마음을 가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규정일 것입니다. 혹자는 동물에게도 욕구가 있다고 반박할 수 있겠으나 동물의 그것은 인간의 욕구와는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자아의식이 인간에게만 있는 까닭입니다. 인간은 몸을 유지하고 번식하기 위한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의 동물적 욕구뿐만 아니라 평화를 꿈꾸고 진리에 다가서려는 거룩한 욕구 또한 갖고 있는 존재입니다. (동물적인 욕구와 다른 이것을 소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바라는 마음, 추구하는 마음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이러한 욕구는 삶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같습니다. 그것은 삶을 데우고 밝힙니다. 욕구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적인 힘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욕구를 가진 존재임을 늘 의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초연한 듯 스스로를 속이지만 세속의 모든 사건은 욕구와 욕구의 부딪힘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사회의 질서라는 것이 그 부딪침을 최소화하기 위한 사회적 약속인데, 문제는 그 약속이 지배계급의 권력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질서는 도덕을 앞세워 피지배계급의 욕구를 억압합니다. 그리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모든 권력 관계에 대응합니다. 부자와 빈자,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선배와 후배,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등등. 권력이란 더 많은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지위입니다. 따라서 피지배자는 남몰래 지배자를 모방하고 경쟁합니다. 욕구의 존재인 우리는 미시이든 거시이든 끊임없이 권력투쟁의 장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은 정치라는 이름을 갖기도 합니다. 폭력은 그 투쟁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조리한 질서는 오랜 세월을 거쳐 내면화된 뒤 다음과 같이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힘없는 자는 힘 있는 자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그것이 바로 세속적인 의미의 도덕이다.’ 그것은 당연한일이 되곤 합니다. 무의식의 삶을 사는 우리는 그런 이유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계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욕구와 욕구가 부딪히기 때문에 폭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상대방을 적 또는 장애물로 간주하고 낙인을 찍으며 타자화합니다. 인간은 결코 동등한 인간에게는 폭력을 가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더러운 미물 또는 사물로 여기지 않는 한 폭력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마음의 문은 닫혀야만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비폭력대화의 목적은 나와 너의 마음을 열고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선 나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대개는 자기의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억누르거나 자의식의 길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음, 그리고 자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마음이란 혼의 전반적인 작용을 말합니다. 자의식은 몸에 붙잡혀 있는 마음, 흔히 우리가 라고 여기는 생각의 총체입니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동양에서 이 는 일종의 거짓 나, 거짓 자아입니다. 에고(ego)라고도 하는 이 는 비유적으로 참 나, 참 자아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의식이란 인지학적으로 보면 감각혼에 봉사하는 오성혼의 차원입니다. 그것을 넘어서야 비폭력대화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나의 마음을 바라본다고 했을 때, 던져야 할 질문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이어야 합니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 생명체, 혼체, 자아(), 그리고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아는 육체와 생명체, 혼체의 활동에 개입하여 각 구성체들의 삶을 영적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육체는 우리의 몸을 이루는 물질적인 요소로서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입니다. 생명체는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형태를 갖추도록 하는 형성력이자 생명력이며,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지요. 혼체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깨어나 느낄 수 있고 욕구할 수 있게 하는 영혼적인 요소입니다. 앞에서 말하는 에고는 아직 영의 차원에 이르지 못한 자아를 말합니다. 영의 차원에 이르지 못한 낮은 차원의 마음은 외부의 자극에 대해 일어나는 몸의 반응이기도 합니다. 에고는 자기중심적이고 소유에 집착하며 소유물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외부의 자극이 몸의 감각기관에 닿으면, 생명체와 맞닿은 곳의 혼체는 쾌감과 불쾌감을 느낍니다. 따뜻한 날 차가운 물을 만지면 쾌감을 느끼지만, 추운 날엔 똑같은 그것이 불쾌감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아직 여기에는 호오(好惡)가 없습니다. 쾌감과 불쾌감은 몸을 가진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문제는 그 반응이 좋거나 싫다고 평가될 때 생깁니다. 쾌감과 불쾌감은 순식간에 좋음과 싫음으로 느껴집니다. 좋음과 싫음은 혼체의 가장 낮은 차원의 평가로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분별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낯선 사람을 보았을 때 그의 외모에서 받은 첫인상이 그에 대한 평가의 방향을 가릅니다. 좋음과 싫음은 집착을 낳는데, 좋든 싫든 그 평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에 의해 판단까지 이어집니다. 이러한 평가, 판단, 분별은 대단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보통 자아는 자신의 판단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객관화하기 위해) 도덕이라는 옷을 입힙니다. 무의식적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판단은 우리의 감정과 욕구를 감추고 그것을 정당화합니다. 자아는 항상 자기가 옳(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혼체에서 받은 느낌은 영혼의 차원에서 다양한 감정으로 변화합니다. 영혼은 감정혼과 오성혼, 의식혼의 세 영역이 있습니다. 감정혼의 영역에서 자아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이 말은 욕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혼은 자신의 욕구에만 집중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정신의 힘을 잃어버리지요. 그 순간만큼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말 중에 정신이 나갔다는 말은 굉장히 정확한 표현입니다. 대개 흉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은 상황에서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일을 벌입니다.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어도 감정에 쉽게 사로잡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폭력적인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정에 사로잡힐수록 자신이 감정에 붙잡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은 자신이 화났다는 걸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슈타이너는 정신수행의 기초가 이러한 감정혼의 통제에 있다고 말합니다. (다음에 계속)

[김송미 기자 ssami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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