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삶에 대하여

기사입력 2020.05.21 10:18 조회수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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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삶(Restorative Life)에 대하여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코로나 19로 인해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3차세계대전 대신 팬데믹이 세상을 휩쓸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 체제는 이로써 끝나는 것일까? 공장이 멈추고 비행기가 공항에 머물러 있다. 덕분에 푸르른 하늘이 돌아왔다. 사람이 무서워 얼씬도 못하던 동물들이 한가롭게 도시의 거리를 거니는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해외여행을 할 수도 없고, 경제적인 풍요도 만끽하지 못할 것이다. 익숙했던 삶과 작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 대체 무엇이 가장 소중한 걸까, 우리 삶에서?

 

안전한 공간

 

우리는 ‘안전’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자발적으로 실천하고 마스크를 쓴다. 안전만큼 소중한 ‘접촉’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 새롭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포옹은커녕 악수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출하고 돌아와서는 정성껏 비누로 손을 씻고 청결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것이 관계의 약화로 가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과잉된 관계를 청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불필요한 만남을 자제하면서 우리는 가족과 소수의 동료들에게 한정된 관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관계가 정말로 안전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가정폭력과 학대, 이혼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가족 또는 가정은 이상화된 상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가까운 거리 탓에 긴장이 풀려 서로 간에 무례를 범하기 쉽다. 도덕적인 비난과 거친 감정의 표출이 일상화된 가정이라면 누구도 안전함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직접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가정은 안전한 공간의 최전선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더 각별히 신경쓰고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면 가정은 평화롭고 안전한 안식처가 아닌 위선과 위악이 난무하는 지옥이 될 것이다.

 

신체적인 안전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전은 일상적 노력을 기반으로 한다. 직장에서도 정서적 방역은 필요한 일이다. 비난과 평가 같은 정서적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마음에도 마스크를 쓸 필요가 있고, 어지러운 회의와 토론을 끝낸 뒤에는 비누로 손을 씻듯 마음을 털어내야 한다. 이것은 나를 지키는 일인 동시에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때야 하는지를 배우는 일이다. 내가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은 도덕의 기초다. 그러나 타인은 비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 자유를 인정하되 영향을 받지 않고 차단하는 것이 정서적 방역의 요지다.

 

존중

 

누구나 ‘존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존중의 뿌리에는 인간존재의 고귀함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한다. 존재감이 약한 사람들이 잘하는 게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다. 비싼 물건을 구입해 SNS에 전시하거나 남을 괴롭힘으로써 관심을 받고자 한다. 괴롭히는 건 여러 방법이 있다. 이들이 바라는 건 무엇일까? 궁극적으로는 온전함일 것이다. 남의 시선에 상관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 자체로 평온을 느끼는 것. 의식하지는 못할 수 있지만 존재감은 그런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온전함을 느끼는 것 또는 즐기는 것.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바라는 것은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부모가 아이 곁에 존재하지 못한다. 몸은 있어도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 아이에게 가장 큰 선물은 부모의 현존이다. 아이는 그걸 느낀다. 부모의 존재가 공간을 꽉 채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 수 있는 것이, 누군가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존재감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만히 홀로 존재하는 것이 불안하고 두렵다면 그 원인을 찾아 치유하는 일이 어른에게 주어진 과제다. 완벽한 존재가 아닌 우리는 누구나 일종의 병자이므로 덜 아픈 이가 더 아픈 이를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만큼.

 

자아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또는 많아도,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성적 지향이 무엇이든, 어디에서 온 사람이든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식물이나 동물과 다르게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유일하고 무이하다. 정신적인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하나의 우주와 같다. 내가 내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느낌, 즉 자아감을 느끼지 못할 때 우리는 무력하다. 이것을 인정하는 게 존중의 시작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자아를 침해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린 아이여도 자기 일은 자기가 해내고 싶어한다. 중증의 장애를 가진 이도 그렇다. 이 주체성을 훼손하는 것이 폭력이고 범죄다. 반복적으로 폭력에 노출된 사람의 자아는 약화되거나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자아는 성인이 된 뒤에 비로소 홀로 설 수 있다. 아이들이 보호받아야 하는 이유는 아직 자아가 독립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른과 같은 자아가 아이에게도 존재하지만 보호받아야 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교육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아이의 발달단계에 대해 알아야 하고, 아이의 기질적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아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교육을 우리는 그동안 해 왔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비대면 수업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교육자들이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그 핵심에 성장하는 아이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다면 어른의 자아는 성장을 멈췄을까? 그렇지 않다. 교육적으로 아이들은 가까운 어른의 자아를 경험하며 성장한다. 따라서 어른들 역시 더 성숙한 자아로 거듭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수많은 경험과 사유가 통합되면서 자아는 더 온전해지고, 어린 시절의 자기중심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어른의 과제는 이렇다. 자기 인식, 그리고 사회적 책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마음

 

일상에서 우리가 자아를 느낄 수 있을 때는 무언가에 몰입할 때이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작업에 몰입할 때 또는 아이와 놀아 주는 일에 열중할 때 자아는 깨어난다. 자아는 하위요소인 마음에 대해 깨어 있고 통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에 끄달려가는 게 아니라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스리며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면 자아가 약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은 나의 소유물이지 내가 아니다. 마음의 세 영역인 사고, 감정, 의지 또는 생각, 느낌, 욕구는 내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작용들이다. 이것들은 나의 상태를 드러내며,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나를 강화시킬 수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감정과 욕구 역시 적절한 방식으로 표출될 필요가 있다. 회복적 실천으로서 대화와 대화모임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이러한 마음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고, 존중받는 느낌을 통해 자아가 강해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여럿이, 또 혼자 질문을 던지고 답해야 한다. 1.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2. 그 일로 인해 어떤 감정이 생겼는가? 기분이 어떠한가? 3. 내가 바라는 건 무엇인가? 나에게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고 마음을 알아 주는 것이 공감이다. 우리는 누구나 공감받고 싶어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마음을 공감하는 것, 그리고 타인과 대화를 통해 서로 공감하는 일이다. 그럴 때 우리 삶의 공간은 더욱 더 안전해진다.

 

행복

 

정리하자면, 우리는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자아감 또는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하므로 언제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접촉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감정, 행위에 영향을 받는다. 관계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 대해 깨어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질수록 힘이 생긴다. 지금 나에게 채워지지 못한 것, 내가 이뤄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또렷해지면, 식물이 빛을 향해 가듯 우리는 그리로 나아갈 것이다.

 

행복이란 안전한 관계 속에서 존재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존중받는 느낌, 내가 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 소망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감각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한다.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최대한 자신을 지키고 공동의 행복을 위해 긍정적인 노력을 지속하는 것, 이것이 곧 회복적 삶일 것이다.

 

 

2020. 5. 19.


[발도르프 뉴스 기자 anthroposo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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