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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발도르프 교육학이 꽃피고 있다
한국에 발도르프 교육학이 꽃피고 있다
페터 랑 Peter Lang 바덴-뷔르텐베르크 발도르프 유치원 연합회 회장단 번역 이정희 독어독문학 박사, 인지학 센터 대표 사람들은 이상을 가지고 행동한다. 한국의 여성 이정희는 그런 이니시어티브를 가진 사람들 중 한 명이다. 1980-90년대 그녀는 마르부르크에서 독어독문학, 언어학과 서양예술사를 전공하며, 루돌프 슈타이너의 저서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그 후 그녀를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 교사 양성과정으로 이끌었다. 교사양성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이정희는 발도르프 교육학을 실현시키는데 힘을 보탰다. 먼저 비교적 큰 그룹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이 모임은 단체가 유일하게 존재할 때의 모순을 알아차리고, 다양성의 효과를 생각하며 자신의 길을 가게 되었다. 2000년 4월, 적극성을 지닌 한국인들은 <한국 루돌프 슈타이너 인지학 연구센터>를 설립했고, 그해부터 <행동하는 정신>이 출간되고 있다. 인지학 연구센터는 그해 발도르프 교육에 대한 심포지엄 행사를 치루었고, 이어서 일본 발도르프 교육학자들과 교류하며, 독일 발도르프 유치원 실습을 주관하였다. 또한 교육자와 농부 그룹을 엮어서 이집트 세켐 견학을 조직하기도 했다. 피사Pisa-수석의 획득은 아이들 희생의 댓가 최근까지만 해도 한국은 학생 학업성취도 비교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했다. 지난번 결과에서는 한국이 중국의 도시 상하이에 첫 번째 자리를 내어주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 다음 순위를 지키고 있다. 오로지 이 결과만 보면, 사람들은 그런 성공을 가져온 교육제도를 부러워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이러한 성공으로 이끈 아동과 청소년의 학습 조건과 생활 조건들, 교육적 방법론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보기 좋던 그림은 그 빛을 잃고 만다. 유아교육현장에서 이미 아들이 단일연령으로 즉 5세반, 6세반, 7세반으로 나뉘어 지적 학습에 집중하고 있다. 더 일찍, 더 빨리 그리고 더 학습에 방향을 맞추는 것이 좋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이들의 창조적 기쁨, 판타지, 놀이에 대한 흥미는 거의 일깨워지지 않고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유아교육현장에서 전자 미디어의 지배는 압도적인 반면 세상 체험, 세상과의 만남 그리고 창조성은 최소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 학부모, 유아교사, 학교교사, 대학의 교수들이 점점 아이들이 뭔가 잘못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다. 이들이 다른 것을 찾고자 인터넷을 통해 또는 해외체류 경험과 유학을 통해 의미 있는 교육에 대하여 시선을 돌리고 있다. 아이들의 기본 욕구에 알맞은 대안들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간과할 수 없는 유아기의 열악함은 변화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고 희망하고 있다. 발도르프 유아교사 - 세미나의 시작 2002년 10월 필자는 초대를 받아 서울을 방문했다. 한 주 동안의 공개 강연과 좌담회를 마치고 한국의 활동가들과 집중적인 대화를 가진 끝에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 유아교사 사범대학과 한국 루돌프 슈타이너 인지학 연구센터가 공동 협력하여 한국에서 발도르프유아교사 양성과정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이듬해 2003년 8월 유아교사 양성과정이 시작되었다. 높은 호응에 힘입어 연구센터는 2006년 발도르프 유아교사 양성과정을 확대하였다. 아카데미를 연이어 2회씩 제공하여 참석자가 총 150명 이상 되었다. 교육내용은 한국의 연구위원과 독일 강사진이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2012년부터는 유아교사 양성과정을 1회(90명)로 줄이고, 대신 발도르프 학교교사를 위한 코스가 만들어졌다(60명). 발도르프 유아교사과정의 참가자들은 매해 1-2회 해외연수를 떠난다. 약 30명 정도가 슈투트가르트, 만하임과 하이델베르크의 발도르프 유치원 현장을 찾아 실습하고, 이어서 여행 마무리로 스위스 도르나흐에 있는 괴테아눔을 방문한다. 발도르프 교육운동의 결실 60개 이상의 유아교육현장이 한국의 각 도시에서 현재 발도르프현장을 꾸리고 있거나 전환과정 중이다. 유아교사 양성과정은 한국 슈타이너 인지학 연구센터 이외에 두 곳에서 더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도르프 유아교육을 지향하는 현장 수는 150개 이상이다. 한국발도르프교사협의회는 현장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발도르프평가인증을 실시하고 있다. 가능한 한 독일강사들도 한국의 발도르프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발도르프 유아교육 현장 수가 증가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학부모의 발도르프학교에 대한 소망도 커져가고 있다. 발도르프 교육을 실천하는 다섯 학교에 이어, 인지학 연구센터의 지원을 통해 2012년 3월 초 여섯 번째 발도르프학교가 탄생했다. 연구센터의 교육공간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내부 강좌가 열리고 있다. (미술, 염색, 수공예 등) 또한 학부모 상담과 모두를 위한 책읽기 모임과 합창 시간도 있다. 연구센터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연구센터는 오이리트미 순회공연을 기획하여 비텐의 “젊은 무대 Junge Bühne” 단원 18명을 초대했다. 유아와 성인을 위하여 여러 도시에서 25차례 공연하는 동안 약 7500명 이상의 관객이 한국에서 오이리트미를 감상했다. 파트너 관계의 성공적인 형성 9년 전부터 한국의 연구위원과 독일 강사는 점점 늘어나 이제 커다란 한독 강사진이 구성되었다. 독일 강사들은 발도르프교육계에서 저마다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한국 동료들은 독일에서 장기간 유학을 마쳤기 때문에 독일어에 능숙하다. 우리는 즐겁게 함께 힘을 모아 작업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새로운 과제가 계속 생겨나고 있다. 이렇게 열정의 불이 계속 타오르고 있음을 우리는 매번 체험한다.
신비적 지혜에 비추어 본 예술
신비적 지혜에 비추어 본 예술
신비적 지혜에 비추어 본 예술 Rudolf Steiner 번역 여상훈 | 루돌프슈타이너 전집발간위원장 강연 1 (GA275) 1914년 12월 28일, 스위스 도르나흐 <기술과 예술> 여기서 제가 행한 강연들의 주된 목적은 정신과학의 인식과 오늘날 요구되는 삶에 관한 이해 사이를 잇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 주제를 두고 몇 가지 견해를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현대 생활이라고 불리는 것은, 도시적인 삶 또는 그와 관련된 생활 속에서 자연과의 직접적인 연계를 잃어버리게 된 사람들이 생생하게 겪고 있는 삶으로 보입니다. 현대의 삶이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그런 삶이 인류의 물질적인 문화와 정신적인 문화의 진보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정신과학(=인지학)이 우리에게 주는 자극이라고 여기는 내용이 현대적 삶 속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 우리의 생활에 등장하는 것들에 맞서 어느 정도 균형을 잡으려면 우리는 정신과학이 꼭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정신적이고 신적인 생명의 힘들을 약화하고 파괴하는 현대 생활의 내용을, 인지학이 어느 정도 상쇄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이른바 정신계 입문의 초기 단계들을 지나가면서 삶의 연결고리 안에서 현대 문명의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영향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삶에 대해 현대 생활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르쳐주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정신성이 아닌 것에 의해 인도되는 외형적인 삶의 관찰은 그 경험만큼 깊은 가르침을 주지는 못합니다. 영계입문의 첫 단계에 들어선 사람은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기차나 배 안에서 하룻밤을 지낼 때 하게 되는 경험과 유사합니다. 영계입문 삶의 첫 단계에 들어선 사람과 그런 입문에 연관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즉, 전자는 선박이나 기차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지내는 동안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체험을 자각합니다. 입문을 통해 그 영향을 알게 된 사람과 똑같이, 입문이 아닌 다른 경로로 그 영향을 알게 된 사람도 당연히 그런 체험이 사람의 유기체에 미치는 전체적인 영향을 압니다. 사람의 본성에 미치는 전체적인 영향은 당연히 차이는 없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신과학적인 사실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잠을 자는 동안 우리는 자아와 아스트랄체와 함께 우리의 물질체와 에테르체 바깥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주 법칙이 자연스레 우리에게 명한 제약들로 인해, 우리는 사실상 먼저 우리의 자아와 아스트랄체과 함께 특히 물질체와 에테르체에 직접적으로 가까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서 잠을 잘 때, 우리는 사실상 자아와 아스트랄체과 함께 기차의 바퀴를 비롯한 기계장치가 일으키는 그 모든 제동과 진동과 굉음을 오롯이 겪게 됩니다. 최신형의 증기선박에 타도 그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느 경우에나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것의 한가운데에 존재합니다. 음악적이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을 체험하면서도, 우리는 온전히 그 안에 머물게 있는 것입니다. 정신계 입문의 맨 첫 단계에라도 진입한 사람이면, 물질체와 에테르체 안으로 자아가 어떻게 아스트랄체를 동반하고 돌아오는지를, 잠에서 깨기 직전에 기계의 압박을 통해 겪고 체험한 것이 무엇인지, 자아와 아스트랄체가 잠에서 깨어날 때 느끼게 됩니다. 조화롭지 못한 이 모든 짓누름과 잡아당김을 우리는 물질체와 에테르체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선박과 기차의 기계음이 아스트랄체와 자아에 남긴 여운과 함께 잠에서 깬 적이 있고, 그 여운을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자각해본 사람은, 물질체와 에테르체의 내적인 법칙성으로 부터 자신이 깨어 있는 상태와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자아 및 아스트랄체의 체험 같은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압니다. 우리가 자각하는 것은 실제로 엄청난 무질서, 가장 난폭한 굉음, 파열, 찢어지고 부서지는 소리로써,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이 에테르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대충 비교해도 여러분은 제대로 이해하시리라고 생각되는데, 물질체에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르게는 우리의 에테르체에 영향을 미쳐서, 기계 안에서 짓이겨지고 부서지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이런 것은 현대 생활에서 피할 수 없이 동반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저는 처음부터 아예 경고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제가 우려하는 그런 충돌은 자칫 신지학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숨겨진 오만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숨겨진 오만함은 여기저기서 이미 충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저의 이런 말에는 구체적인 것은 고사하고 그 어떤 포괄적인 암시는 없습니다. 오늘날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든 판단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언급한 신지학 추종자들이 오만해지는 경우에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파괴적인 힘들로부터 나의 몸을 단단히 지켜야 해. 현대 생활의 이 모든 영향에서 나를 단단히 지켜야 해. 제대로 된 환경의 작은 방 안에, 신지학에서 권할 법한 색으로 꾸민 벽의 방 안에 나를 꽁꽁 가두어서, 그 어떤 것도, 특히 현대 생활이 가져다주는 것이 내 신체의 조직기관에 닿지 못하도록 지켜야 해.” 저는 제가 겪는 충돌로 인한 영향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어서, 우주 카르마로 인해 우리에게로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그 모든 영향을 피해 자신을 지키려는 행동은 허약함에서 기인합니다. 그와는 달리 유일하게 인지학은 사람의 심성을 강하게 만들 수 있으며, 그런 영향들로부터 우리의 내면을 무장하고 강화하는 힘을 계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 활동하는 장에서는 현대 생활로부터 움츠러들기를 권고하고 정신생활을 가두는 일종의 온실 문화를 만들기를 권고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진정한 정신문화라는 토양에서 일어날 일은 결코 아닙니다. 약질인 사람들은 현대 생활에서 도망쳐서 그런 생활의 영향을 받지 않을 이러저러한 장소로 물러나게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결국 그런 태도는 영혼이 강하지 못하고, 약한 탓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그런 후퇴가 아니라 정신과학과 정신 연구에서 얻는 힘으로 자기 자신을 관철시킴으로써, 현대 생활의 영향을 막을 수 있게 영혼을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외부의 방해와 공격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아리만의 영들(ahrimanische Geister)의 방해와 공격을 뚫고 정신적 신성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전에 제가 자주 언급했던 것, 한 가지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사람은 밤에만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낮에도 잡니다. 낮에 자는 잠은 밤잠처럼 그렇게 잘 인식하지 않을 따름입니다. 밤이 되면 사람의 사고 활동은 흐려집니다. 그리고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의 사고 안에서 살아가므로, 사고 활동이 흐려지는 것을 더 잘 인식하는 것은 당연히 밤에 잠을 자는 동안입니다. 낮에 쉬는 것은 오히려 의지생명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의지에 기대는 비중이 작으므로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중의 하나로 철학자들은 의지의 자유와 부자유를 두고 갑론을박합니다. 철학자들은 낮에 잠을 자면서 의지를 연구하는 탓에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의지의 자유와 부자유, 결정론과 비결정론을 두고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실제로 날마다 갖가지 일상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의지생명을 거의 자각하지 못합니다. 의지생명은 잠재의식 안으로 가라앉아 있으며, 잠재의식은 순전히 아스트랄체에 속하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있는 낮에도 우리를 둘러싼 현대 생활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현대적 기술문명의 그 모든 압박과 충격을 경험합니다. 밤이 되면 우리는 감정생명과 사고생명 쪽에 더 많이 그런 압박과 충격을 받으며, 낮에는 의지생명과 감정생명 편이 더 많이 압박과 충격에 더 빠져듭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현대 생활이라고 일컫는 것이 인류의 발달과정에 늘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후기 아틀란티스 제5문화기가 시작한 뒤입니다. 후기 아틀란티스 제5문화기의 시작과 함께 이 현대 생활도 시작된 셈입니다. 외적인 정신문명은 이 현대 생활의 등장에 대해 어떻게 말하나요? 잘 아시다시피, 현대의 정신문화는 이 현대 생활과 함께 이루어 놓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고대와 중세 전 시기를 통해 인간은 자연을 제대로 관찰하는 능력을 계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자연 관찰에 바탕을 둔 자연과학이 나오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자연과학이 나왔다.” 근대를 이렇게 말하는 경우에는 후기 아틀란티스 문화기의 시작과 맞아떨어집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옛날의 자연관찰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추상적인 법칙성을 바탕으로 자연을 관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자연과학도 흔히 말하는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자연법칙을 체험함으로써 자연의 힘을 인간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적 기술이며, 그런 현대적 기술의 모체는 사람이 자연법칙을 알게 되고 그 자연법칙에 따라 물질을 기계로 만든 것입니다. 그 기계를 자연과 생활에 사용하여 현대 생활을 기계에 의존하도록 꾸며 기술이 지배하는 환경을 만든 것이, 바로 우리를 둘러싼 현대 생활과 그로써 만들어지는 모든 것의 바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근대야말로 진정한 자연과학의 토대를 놓았고 그와 함께 자연과 그 힘들을 확실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라고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것을 아주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리만의 언어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리만의 언어로 말했으니까요. 이제 우리는 그 아리만의 언어를 참된 언어로 옮겨보아야 합니다. 참된 언어를 통해 다시 정신과학을 배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외적 자연을 관찰하여 얻은 의미만 부여된 단어들이 아니라 우주를 전체로, 즉 그 본질과 정신생명을 포함하여 관찰할 때 부여되는 단어들을 통해서 정신과학을 배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기술을 만들어낼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아주 외면적으로만 생각해봅시다. 그 경우의 작업은 두 가지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 단계는 자연의 연결고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바위를 부수어 돌맹이를 만들고, 숲을 망가뜨려 목재를 얻습니다.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자연의 연결고리를 부수고 망가뜨려 자원을 얻어내는 겁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렇게 자연을 망가뜨려 얻은 것을 다시 모아 자연법칙이라고 알게 된 것에 따라 기계를 만드는 것이죠. 우리가 겉으로만 보면, 일은 이렇게 두 단계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그 사안을 내면적으로 보면 어떨까요? 내면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짓부수면, 제일 먼저 광물로서의 자연을 부수면, 이전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광물은 일종의 쾌적감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런 쾌적감은 그 광물속에 정신적인 요소를 느끼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런 것을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일어나는 데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과정에서 자연을 유지해주는 원소영들, 즉 이것도 정신계의 발전된 위계의 영역에 속해있는 것인데, 그 존재들을 자연으로 부터 추방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모든 것에는 원소영의 존재가 있습니다. 자연을 짓부수면서 우리는 자연의 영들을 짓눌러 정신계의 영역에서 쫓아냅니다. 이 과정은 첫 번째 단계와 지속적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자연을 부수고 짓뭉갬으로써 그 자연으로부터 자연의 정신들을 분리시킵니다. 우리는 이 자연의 영들을 야훼 신들에 속하는 영역에서 자기 자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날갯짓을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쫓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첫 번째 단계를 ‘자연 영들의 추방’이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자연을 갈갈이 찢고 괴롭혀 얻어낸 자원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자연법칙에 따라, 하나 또는 일련의 기계를 형성하고, 우리가 형태를 만들어 다시 그 안에 어떤 정신적인 본질을 집어넣어 새로운 구조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드는 형성물은 결코 정신이 빠져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정신적 존재를 위한 바탕을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계라는 형태의 형성물 안에 집어넣은 이 정신적 존재는 아리만의 위계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 단계에서 우리는 지속적인 발달 속에 있는 자연 영들을 만나 그것을 추방하고,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기계나 기타 기술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아리만의 영들과 합일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그런 기술로 가득한 근대적 환경 안에 사는 우리에게 이것은 영향을 미칩니다. 즉, 우리는 밤이나 낮에 우리 안에서 자면서, 완전히 하나의 아리만적 환경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입문의 첫 단계에 들어선 사람이 잠에서 깨어날 때, 바깥의 포효와 찢김과 굉음 안에서 그것을 파괴하는 것으로 느끼는데, 즉 자신의 자아와 아스트랄체 속에 있는 그 사람이 물질체와 에테르체 안으로 들어갈 때, 그것을 파괴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이른바 아리만의 원소 영들과 공존한 결과를 자기 유기체 안에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3의 단계로써, 문화의 단계로
발도르프 학교 환경교육의 단초
발도르프 학교 환경교육의 단초
발도르프 학교 환경교육의 단초 안드레아스 주흐안트케 Andreas Suchantke 비텐아넨 발도르프 사범대학 교수 번역 이정희 독어독문학 박사, 인지학센터 대표 발도르프 교육의 교수법에서 주력하는 특징점은 늘 학생의 나이에 따라 보이는 특별한 발달 상황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저학년의 아이들은 성장하는 사람들과 구분되기 때문에, 인지능력에서 뿐 아니라, 특히 환경을 체험하는 것과 관련한 방법론이 고학년의 교수법과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아이에 알맞게” 이루어져야 한다. 처음 저학년에서는 모든 학습 내용이 정서적으로 강하게 다가와야 하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이 내용들은 나중에 고학년이 되어 관련 주제들과 함께 학문적이고 실제적으로 접근하는데 풍요롭게 하는 기본 토대를 마련하는데, 무엇보다 환경 내용은 훗날 윤리적 태도를 결정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며, 동시에 발도르프교육의 독특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다음 설명에서 특별히 상세하게 다루어 본다. 그렇다고 이것이 과학적 교육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환경에 대하여 부모가 말하는 자세와 관점에 의해 강도 높은 인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폭 넒은 영역에서 환경 위기에 대한 무관심, 둔감성, 억누름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일상의 끔직한 뉴스들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적극적인 참여는 다만 소수에게만 해당한다. 게다가 이 시대적 생활양식의 결과로 아이들 대부분이 자연과 멀리 있다. 일반적으로 자동차를 타고 “자연”을 스쳐 지나가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자연을 체험한다. 그런데 아이 주변의 자연 환경은 이런 방송들에서 주목하는 장면들과 동떨어져 있으므로, 아이에게 아무것도 다가오는 것이 없고 지루할 뿐이다. 이처럼 환경 교육의 단서에 대한 전제들은 현재 유리한 편이 아니다. 하나의 전형적 예시가 이것을 명백히 설명해주고 있다: 한 초보 발도르프 교사가 독일의 어느 대도시에서 1학년을 처음 맡았는데, 아동들이 거칠고 혼란해서 완전히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젊은 담임교사는 아이들이 아침 걸음걸이에서 보이는 다듬어지지 않은 움직임을 진정시켜 보려 했다. 그런데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많은 아동에게 식물과 작은 짐승들에 대한 적대심이 감돌고 있었다. 이들의 내적 자세를 이렇게 서술할 수 있다: 내쫓아 몰아내기, 짓밟기, 밟아 부수기.” 물론 적지 않은 아동 청소년들이 환경 보호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각 단체에서 청소년 그룹이 자연보호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한다. 이때 다양한 새를 관찰하고, 인공 새둥지도 가져다 놓는 일 등을 하며-, 규모가 큰 자연보호 단체들은 청소년들의 커다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들은 아주 다양한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이런 방향에 참여하는 인원수는 소수에 불과하다. 이와 연결하여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많은 청소년과 아동의 내적 자세를 계발하는데 도움을 주고 보살펴 주려면, 학교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전제들은 단순하지 않음을 언급한 예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시대적 요구가 첫째 순위이고 동시에 커다란 기회로써 중요하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단행해 보아야 한다. 발도르프 교육과 그 기여의 시각에서 질문을 던지기 전에, 환경보호와 예방의 두 가지 서로 다른 발단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것은 환경교육의 관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 인지학적 동기는 사람의 삶의 질에 방향을 두어 환경에 적정한 기술들, 예컨대 공해물질의 절감, 대체 에너지 찾기, 쓰레기 줄이기, 독소 없는 농업 등, 환경피해들을 제한하고 줄이기를 시도한다. - 생태적 또는 생명 중심적 발단은 자연 자체 쪽으로 향해있다. 고래 또는 위협받고 있는 다른 동물의 종이나 식물의 종이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자연의 생태체 등을 보호하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이용가치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두 방향은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 있고 긴밀하게 상호보완된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 접근 방법은 결국, 항상 회복하기와 증상의 치유에만 머문다. 그 이유는 땅의 생명, 숲 등 자연의 생명 조건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임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지하자원의 저장고이며, 미래에는 좀 더 머리를 써서 접근해야한다는 입장이다. 이전부터 그래왔는데, 이것은 근본적인 숙고를 하지 않은 부분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건강한 생명 환경 안에서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람이 자연 고유의 법칙성과 요구들을 존중할 때 주어질 수 있다. 이런 입장은 완전히 생태 중심적 동기부여 뿐 아니라 다른 강점도 지닌다. 즉, 대부분의 청소년에게 열려있고 잠재되어 있는 이상주의에 호소하여 -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 나아가 불이익을 당하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형제를 위해, 주변의 피조물을 위해 동참할 가능성을 가진다. 생태중심의 환경보호는 감성을 움직인다. 이 분야에서 온 힘을 다하여 좋은 일을 위해 전투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인물들에서부터 출발하여, 많은 젊은이들에게 강렬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린피스의 환경운동가들은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영웅들이다. 여기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배경을 나란히 두고 보면 흥미로운 점을 찾을 수 있다: 착취당하던 노예 계층, 자신의 몸과 산업노동자 층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발전되었던 사회적 양심이 사회를 넘어서 오늘날 자연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런 발전을 위해 모든 수단을 써서 계발하는 것이 교육의 중심 과제가 되었고, 무엇보다 여기서 실제 학생들에게 도달하기 위해 어떤 동기부여를 주어야 하는 기회가 되었다. 인류 중심적으로 방향을 둔 환경교육 하나만으로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랑에하이네Langeheine와 레만Lehmann의 연구에서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분명 환경교육을 통해 지식의 수준은 끌어올릴 수 있으나, 환경 보호에 관한 관심을 일으키고 행동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방식의 의도적인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 채 수동적인 참고 지식으로만 머물 뿐이다. 아동과 청소년을 자연으로 데려가기 학생들이 동물과 식물에 대하여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던 교사의 체험들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자. 이 교사는 자기 반 아이들이 생명체에 다르게 접근할 방법을 찾다, 동물과 식물에 대한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학문적 사실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의미가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한 시적인 방식으로, 나뭇잎 끝에 맺힌 빗방울이 보고 있는 모든 것들, 주위의 온 세상, 하늘과 별, 거기에 비추어지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개미와 달팽이가 만나, 개미가 달팽이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이 점점 귀 기울이기 시작했고 다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밖에서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달팽이를 보면 밟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길가로 치워주었다. 이야기를 통해 자연, 식물과 동물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연결이 생겨난 것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발전되었다. 자연을 아끼고 좋아하는 것이 한 해를 지나며 깊어지고 확장되었다; 물이 흐르는 숲 속의 어느 곳을 늘 다시 찾으며, 일 년 내내 많은 것을 관찰했다. “이어서 이곳은 우리 길이 되었고, 우리 시냇물, 우리 나무, 그리고 우리 숲속이 되었고, 우리의 다람쥐와 우리 새가 되었다. 여름에 작은 시냇물이 마르면, 아이들은 슬퍼하고 마음을 쓰며 (<대체 우리 물이 어디로 가 버린 거지?>, 물을 퍼다 부어주려고까지 했다. 게다가 이런 가뭄의 원인을 알아내려는 내적 열망을 보이며 그것을 찾아냈다.” 이런 관찰들은 처음 생각의 자극을 주었고, 진정으로 탐구하는 내적 자세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식물과 동물에 대한 관계, 사랑과 관심이 생겨났다. 그러나 만약 감성의 차원이 소홀해지면, 대상과 아무런 연결이 생겨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역점을 두어 이성 차원만 요구하거나 이 부분을 너무 이르게 건드리면, 대상에 대한 감정적 연결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방법은 책임을 갖는 윤리성을 발달시키는데 부적절하다. 《침묵의 봄》이라는 획기적인 책의 저자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고맙게도 무엇보다 어린 아이들의 부모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이의 내면에 경탄의 천성이 살아있게 하려면, 이런 능력을 아이와 나눌 수 있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아이에게 필요합니다. 즉 어른이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의 기적과 놀라움과 기쁨을 아이와 함께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하기 쉬운 질문, “나는 새 종류를 구분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에게 자연에 대해 뭔가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확실한 것은 아이를 지도하는 부모에게 무엇으로 이끄려는 지식이 오히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식적 앎을 아이의 훗날에 일어나는 통찰과 인식을 성숙하게 해주는 씨앗으로 설명한다면, 감성과 느낌, 그리고 감각의 인상들은 그 씨앗이 싹 틀 수 있도록 필요한 비옥한 토양에 해당됩니다. 유아기의 시간은 토양을 준비하는 시기에 해당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새로움과 모르는 것을 자극하는 감각, 호감과 경탄, 그리고 사람에 대한 정서 같은 감성이 한번 일깨워지면, 우리의 대상에 대한 앎이나 지식에 대한 요구가 감성에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한번 생겨나면 지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저학년에서 자연에 대한 감성적 접근 앞에서 교사가 접근한 방식은 발도르프 학교에서 실천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발달심리학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고려하여 그것을 토대로 적용한 것이다. 그래서 유아기와 저학년의 아이들은 실제를 청소년이나 성인과 다르게 체험한다. 교수법에서 나이의 특성으로 차이를 두는 방법론은, 비록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전되었음에도, 피아제 학파의 연구결과와 상당 부분 일맥상통한다. 만 9-10세까지 아동의 체험세계는 청소년과 성인의 체험세계와 같이 사물적이지 않고 “애니 즘적”이다. 아이는 모든 것을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것으로 체험하기 때문에, “사물”, “대상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나무와 달, 돌은 자신처럼 느'끼고, 감정을 가진 존재로 여긴다. 또한 이런 존재들은 아이와 따로 떨어져 독립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아이와 연결되어 있다. (저녁 산책길에 달님이 하늘에서 함께 걷는다. 달님은 아이가 가는 곳을 알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따라다닌다.) 이런 생각은 아이가 세상에 대해 자신이 중심에 서있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동질의 존재들이 하나의 통일체로 닫혀있는 상을 가진 결과이다. 아이는 여전히 자기에게 속한 세상, 자기를 향한 세상 안에 들어있다. 아이는 아직 소외를 모른다. 자연히 이 모든 것이 고도로 기술화된 현대의 정보세계의 영향에 의해 크거나 작은 강도로 간섭당하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실제적인 잠식과 묻힘이 아이들의 체험 방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 문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앞서 서술한 교사의 체험에 나타난다. 교육자가 잘못하지 않고 그것에 확신하는 경우 모든 것이 가능하다. 너무 이른 인지적-추상적, “과학적” 수업방법은 현대 사회의 이런 경향, 즉 아이가 친근하고 친숙하게 체험한 “세상”에서 너무 일찍 떨어져 나와 분리되는 경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분리는 저학년을 보내며 일반 개념을 형성하고 조작과 인과 관계의 사고 능력이 깨어남에 따라 저절로 일어난다. 이런 발달 과정을 인위적으로 앞당기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애니 즘의 단계가 온전하게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서서히 가라앉게 되면, 막 분리가 시작될 때 주변 환경이나 자연과 스스로 친숙한 감성의 기본 분위기에 머물게 되어, 인지적이고 행동지향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관심을 갖는 기본 전제가 된다. 이 연령의 아이들을 맡은 저학년 학교교사(그리고 유아교사)는 자연 현상들을 이에 적합한 방법으로 아이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때 이 나이대의 다른 능력을 고려하여 판타지 능력을 쌓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이야기, 동화 등의 내적 상들이 비유적이고, 유연하고 생동감 있게 강하게 체험되도록 한다. 아이는 체험된 것을 생각하며 마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받아들인다. 아이에게 이런 내적 그림들은 실제로 사물의 외부 세계보다 좀 더 높은 특성을 지닌다
오이리트미에 관한 짧은 소개
오이리트미에 관한 짧은 소개
오이리트미에 관한 짧은 소개 에밀 크놉스 | 비텐【젊은무대 Junge Buhne】대표 인간은 세상을 향해 있고, 세상은 자신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인간 존재의 깊은 비밀, 신비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모음의 울림을 통해 인간은 자기 내면의 경험을 밖으로 드러낸다. 그런가하면, 자음을 통해서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요소를 표현한다. 따라서 한 민족의 언어는 개별성을 넘어서는, 단어와 문장 그리고 의미간의 관계, 즉 언어의 법칙을 가진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음악도 존재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노래를 부르는 중에 마치 곁에 초월적인 존재가 함께 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깊은 어둠의 세계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간은 노래를 부를 때,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음악이 갖고 있는 음정, 음계, 리듬, 화성 그리고 형태의 법칙을 따른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는 그 사람의 개별성을 나타내지만 언어 자체는 사실 그 개인성을 넘어선 것을 표현하게 된다. 즉, 사람의 음성으로 표현되는 언어는 노래처럼 개별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인 규칙을 드러낸다. 감정과 사고, 그리고 동기는, 마치 강물이 강바닥을 따라 흐르듯이, 내면의 움직임을 언어와 음악의 틀을 갖춰 밖으로 흘러 보내고, 그것은 말과 노래가 된다. 우리가 원하면 내면의 움직임을 밖으로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이 되기도 하고, 내용을 표현하는 동작이 되기도 하고, 또한 오이리트미가 되기도 한다. 오이리트미는 언어의 규칙 또는 음악의 규칙을 따르면서 내면의 움직임을 밖으로 드러내 보인다. 하나의 오이리트미 예술작품은 언어나 음악의 규칙 안의 형상과 형성의 힘을 빌린 것이다. 그러나 드러남과 동시에 감추어져 있는 문학과 음악작품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은 바로 가장 완벽한 인간의 도구인 인간의 형상과 움직임 자체를 통해 표현된다. 에밀 크놉스 Emile Cnoops 1954년 네덜란드인으로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태어났다. 7세 때 네덜란드로 와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에서 산림학을 전공하였고 남미 정글에서 일하였다. 그 후에 특수교육을 공부하면서 치료의 힘을 지닌 예술 오이리트미를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헤이그 오이리트미 아카데미에서 오이리트미를 전공하였다. 졸업 후에 모교에서 2005년까지 오이리트미 교수로 활동하였다. 네덜란드 앙상블과 질트 오이리트미 앙상블 대표, 독일 미스트랄 앙상블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부터 독일 비텐Witten 오이리트미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비텐Witten <젊은무대> 오이리트미 앙상블을 이끌고 있다 Uber die Eurythmie Der Mensch kann sich fur die Welt, und die Welt fur sich in der Sprache außern. Damit beruhren wir eines den tiefsten, offenbaren Geheimnissen oder Mysterien des Menschseins. Mit seiner Stimme, mit den klingenden Vokalen, außert der Mensch sein inneres Erleben; mit den Konsonanten bildet er die Elemente der ihm umringenden Welt nach, und die Sprache seines Volkes bettet das ein in einem uberpersonlichen Zusammengang von Wort, Satz und Sinn. Ahnlich groß, wie in der Sprache, ist das Mysterium in der Musik: singend kann der Mensch sich erheben in die Nahe der Sphare der Engel, oder absteigen in damonischen Tiefen. Auch da außert sich der Mensch mit seiner Stimme und folgt die musikalischen Gesetze von Ton, Intervall, Rhythmus, Harmonie und Form. So sehen wir: in jeder Stimme druckt sich das Individuelle des Menschen aus; in jeder Sprache aber druckt sich etwas Uberpersonliches aus. In der gesprochenen Sprache(und so auch in dem Gesang) fließen das Personlichen und das, was uber das Personliche hinaus geht, zusammen. Empfindungen, Ideen, Impulse fließen als innere Regung mit dem sprachlichen oder musikalischen Gefuge zusammen, so wie ein Fluss dem Flussbett folgt, und außern sich als Sprache oder Gesang. Man kann, wenn man so will, sich dafur offnen und diese innere Bewegung in eine außere Bewegung umsetzen. Das kann in dem Tanz(mit Musik), im Mimischen(mit einem sinnlich-bildhaften Inhalt) und in der Eurythmie. In der Eurythmie will man, die sprachlicher Gesetze folgend, oder die musikalischen Gesetze folgend, diese innere Regung in Bewegung sichtbar machen. Ein eurythmisches Kunstwerk bedient sich der sprachlichen oder musikalischen Gesetze in ihren bildenden, gestaltendenKraft; will aber die inspirierte Quelle, die in dem poetischen Kunstwerk oder in dem musikalischen Satz sich ausdruckt und zugleich verbirgt, in der Bewegung des vollkommensten menschlichen Instrumentes, seiner menschlichen Gestalt selber, offenbaren. Emile Cnoops, Nov 2009
여름 청소년 국제 컨퍼런스 "인간이 되십시오 - 미래를 함께 창조하기위한 질문"
여름 청소년 국제 컨퍼런스 "인간이 되십시오 - 미래를 함께 창조하기위한 질문"
여름 청소년 컨퍼런스 "인간이 되십시오 - 미래를 함께 창조하기위한 질문"에 지금 등록하십시오. "인간이 됨 - 미래를 함께 창조하기위한 질문들" 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국제 컨퍼런스가 개최된다. 2018년 7 월 14 일부터 18 일까지 Dornach에서 청소년 부문의 국제 하계 회의 (International Summer Conference)가 진행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시대에 우리는 개인적, 사회적 및 세계적 수준에서 다양하고 수많은 도전에 직면 해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독창성을 확대하고, 우정을 쌓고, 자유롭고 사랑스런 인간을 향하여 자신을 발전 시키도록 호소합니다. 우리 각자가 우리 자신 안에서 맺을 수있는 잠재력을 우리가 어떻게 실현 시킬수 있을까요? 우리는 항상 연결을 찾고 있지만, 사회적 갈등, 다문화 관계 및 소셜 미디어와 가상 현실의 영향을받는 세계에서 연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건강한 미래를 함께 형성하기 위해 어떻게 우리의 차이를 극복 할 수 있습니까? 세대에서 우리에게 무엇이 요구되고 있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강의, 워크샵, 대화, 예술 활동 및 공연을 통해 이러한 개인, 사회 및 지구적 질문을 함께 탐구하고 토론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여름 청소년 회의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가 계획한 미래를 향해 한발짝 나가가기를 희망합니다. 하계 컨퍼런스는 전 세계의 청소년 부문 참가자들이 주최합니다. 7 월 14 일부터 18 일까지 스위스, 도르 나흐 (Dornach)의 괴테아눔 (Goetheanum)에서 열립니다. 아직 등록하지 않으 셨다면 지금하십시오! 컨퍼런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보려면 여기(https://www.goetheanum.org/index.php?id=8774&L=1)를 클릭하십시오! 7 월에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길 바랍니다. 질문이 있으시면 mail@youthsection.org로 전자 메일을 보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