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행사-루돌프 슈타이너 자서전 출간 기념회

기사입력 2018.11.27 13:48 조회수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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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행사

 

 

루돌프 슈타이너 자서전 출간 기념회

인지학 수용의 선구자 장석길 선생님을 기리며

 

일시: 20181214일 오후 2

장소: 사단법인 한국슈타이너인지학센터

 서울시 마포구 독막로 230 우리빌딩 2

 

 가을빛이 완연한 1014일 일요일 오후, 루돌프 슈타이너 자서전 출간 기념회가 열렸다. 사단법인 한국슈타이너인지학센터 초창기 회원이었던 반가운 얼굴들과 이제 막 발도르프 교육 연구에 심취한 새내기 회원들까지 각자가 품었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특히 장석길 선생님의 누나 장숙자 선생님, 여동생 장숙희 선생님과 독일에 거주하는 조카가 함께 해서 따뜻한 온기를 더할 수 있었다. 김송미 선생님의 사회로 시작한 1실천하는 인지학에서는 홍성 농부 장구지 선생님의 삶과 부천 발도르프 학교 담임 이상아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발도르프 교육 현장의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김훈태 선생님의 사회로 시작한 2부에서는 라이어 축하 연주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장석길 선생님을 추억하는 시간을 통해서 그 분의 삶과 고뇌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장숙자 선생님이 들려주신 내 동생 장석길이야기는 고인이 마치 우리 옆에 앉아 미소 짓고 있는 듯한 느낌은 주었다. 마지막으로 슈타이너의 <평화의 춤> 시낭송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선물해 주었다.

 인지학 수용의 선구자 장석길 선생님의 땀과 열정이 담긴 루돌프 슈타이너 자서전 출간이 우리나라 인지학의 학문적 발전과 발도르프 교육의 굳건한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

 

 

<“장석길 선생님을 추억하며...2부를 시작합니다.”>

<슈타이너전집발간위원장 여상훈: “실천하는 인지학, 발도르프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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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장석길

 

 안녕하세요. 저는 장숙자라고 합니다. 고 장석길의 큰 누나입니다. 독일에서 50년간 인지학적 환경 안에 살았습니다. 이정희 선생님께서 동생에 대한 회고를 부탁하셔서 제가 독일에서 동생과 보냈던 4년을 돌아보았습니다. 아마도 제 동생에게 그 기간은 새로운 운명의 길이었던 듯합니다.

 저는 14살에 고향인 당진을 떠나 수원에서 중, 고등학교를 마쳤고, 그 후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할 틈도 없이 독일로 떠났기 때문에, 제가 기억하는 동생 석길이의 어린 시절 모습은 몇 번에 머물러 있습니다. 수원에서 고향 당진을 방문하여 보았던 8살 때이고요, 그 후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독일로 떠나던 그해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그때 고향에 내려가 마지막으로 동생을 잠깐 보았는데, 당시 동생 나이는 13살이었습니다. 그 후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한국을 방문했을 때, 23살 성인이 된 동생과 마주했고, 저는 동생에게 진로를 제안했습니다.

 독일어 교육을 전공한 후 독일로 와서 더 공부하지 않을래?” 하고 물어봤었는데, 그때 그 물음 속엔 저 나름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즈음 저는 루르 지방에 살았습니다. 독일에선 최초로 1969년 말에 설립된 인지학 병원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한 후 일하고 있었죠. 인지학병원(Gemeinnütziges Krankenhaus Herdecke)은 인지학을 바탕으로 설립된 병원이었으며, 이 병원은 12명 의사 선생님의 헌신과 봉사로, 그리고 끊임없는 열정의 힘으로 시작되었고, 그 결과를 지켜본 저에게는 큰 감동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뿐 아니라 저는 이즈음에 1년 정도 도르나흐 괴테아눔에서 오이리트미를 경험하였고, 독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루르 지방의 인지학 사범대학(지금의 비텐 발도르프 사범대학)에 최초의 한국학생으로 등록하여 공부했습니다. 인지학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과 살고 일하면서, 그런 동료들의 뒤에 숨어 있는 힘이 무엇이며 또 그 힘이 어디서 오는가에 대해서 많은 관심과 공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독일에서도 인지학적인 활동이 시작된 초기였기에 동양에도 언젠가는 그런 운동이 있게 되리라는 꿈같은 바람이 있었고, 어느 때고 한번은 그날이 오리라고 저는 예감하고 있었죠. 그래서 동생이 독일에서 인지학 공부를 하고 발도르프 교사가 되어 저와 함께 일했으면 하는 은근한 바람으로 그런 제안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계획을 하나의 씨앗으로 가슴에 품고 독일로 돌아와 독일 시민권을 받고 1977년 오이리트미 공부를 시작하여 1981년에 디플로마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 후 1991년 동생이 독일로 왔을 때는 1976년 저와의 대화 이후 15년이 지났을 때였죠. 저는 그 당시 결혼하여 3명의 자녀를 양육하는 주부이면서 발도르프 유치원과 발도르프학교의 부모로서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동생의 연령이 만 38세였고 언어 문제에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저와 멀리 떨어져 다른 지방의 발도르프 사범대학에서 혼자 공부하는 것이 무리라 생각하였습니다. 동생과 저는 이러한 어려움을 함께 고민하던 중, 지혜가 많으시고 인간관계가 넓으신 슈투트가르트 사범 대학의 크라니히(Kranich)선생님과 상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동생에게 당신은 지금까지 머리로만 공부를 했는데, 이젠 손과 발을 쓰는 공부를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하셨습니다. 더욱이 언어와 인지학을 짧은 기간에 습득하려면 현장에서 일하며 배우는 것이 좋다고 이렇게 추천하셨습니다. “특수학교 교사과정이 있습니다. 남부 지방의 아름답고 유서 깊은 보덴제 호수 캠프힐 공동체 마을에 특수교육학과가 있습니다. 누님과 잘 상의하고 또 자신도 숙고해 보십시오.” 하시더군요.

 저에겐 아주 가까운 형제 같은 독일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이미 20년을 인지학을 바탕으로 설립된 특수학교에서 예술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 학교 앞 마을에서 1년 넘게 살면서 장애아동들과 저의 아이들이 어울려 놀고 식사도 하는 등 자연스럽게 접촉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저의 운명이 그들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교육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푀렌뷜(Föhrenbühl) 이라는 캠프힐 마을에 전화를 하고 약속을 잡아 동생과 그곳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푀렌뷜은 성인들의 산이라는 뜻인 하일리겐렌베르크(Heiligenberg)라는 지역에 있었고, 이름마저 아름답더군요. 그곳은 저의 친구가 일하던 특수학교와 다른 큰 마을공동체로 이루어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고 있었습니다. 직조장, 세탁장, 목공실, 농장 등이 있었습니다. 대략 200명 가까운 장애인과 그들을 도우며 일하는 사람 200명 정도가 그룹을 지어 한 가족같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엔 물론 의사 선생님이 사시고 학교가 있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치료가 있었습니다. 특히 사계절의 축제 때에는 연극이라든가 오이리트미, 합창 등을 공연합니다. 이런 곳에서 장애인과 함께 살며 공부한다는 것은 운명이며, 머리, 가슴, 사지의 수련이라 하겠지요. 그분들과의 상담을 통해 3-4주 동안 실습을 한 뒤에 서로 결정하자고 하였습니다. 동생은 그곳에 실습생으로 남게 되었고, 저 혼자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죠. 동생은 이미 청년도 아니고 더욱이 동양인 남성으로(그때만 해도 그런 일이 아주 드물었다고 봅니다) 언어나 음식, 건강도 좋지 않은데 이렇게 준비 없이 실습의 길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싶어 저의 마음이 아주 편치 않더군요.

 그 후 4주가 지난 어느 여름날 동생이 제 집을 찾아왔을 때 안색은 피곤해 보였으나 4주 전 보다 밝은 기색이기에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답니다. 그 다음 2주를 쉬고 동생은 새로운 운명의 길, 성인들의 산 속에 있는 푀렌뷜로 실습 과정을 위해 떠났습니다.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주말이면 동생은 제가 있는 바이에른(Bayern)으로 와 가사와 육아를 항상 도와주었고, 그래서 친척이 없던 우리 아이들에겐 소중한 삼촌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동생을 경애했던 것은 그의 철저한 리듬적인 생활 때문이었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동생이 우리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저와 함께 기도를 한 후 감사 노래를 부르고 잘 자라(Gute Nacht)!”를 하면 아이들은 자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동생은 잠깐 산책을 한 후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두 시간 동안 슈타이너 전집을 소리 내어 읽더군요. 아이들이 깰 때까지 다시 한 시간 동안 라이어 악기 연습을 했습니다. 생전에 악기라는 것은 한 번도 손에 들어보지 않았다며 노래까지 동반할 때면 아이들이 웃어도, 동생은 재미있게 연습했죠.

 아침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해주고 우리 아이들과 함께 또는 혼자 빵을 싸들고 산이나 강으로 가는데, 제 생각에는 강보다는 산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 살던 곳은 뮌헨과 잘츠부르크의 중간으로, 뒤편에 알프스 산맥이 있고 앞에는 킴제(Chiemsee) 호수가 있는 작은 도시여서 다른 지역 주민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죠. 아무튼 그는 4년에 걸쳐 그 많은 알프스 외곽의 봉우리들을 한 번쯤은 다 올라갔었다고 하며, 슈타이너 전집도 거의 100권을 읽었다고 하더군요. 동생의 졸업장에는 착실하고 진실한 사람이었고 모든 일을 진심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더욱이 그가 4년에 걸쳐 맡아 돌보았던 다운증후군 장애학생 다니엘(Daniel)을 위해 음식 섭취 방법을 그에 맞게 변화시켜, 정기적으로 일어나 간질 발작이 많이 감소되었다는 찬사도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때, 동생은 저에게 여러 면으로, 특히 인지학 공부에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인지학의 씨앗은 제가 먼저 뿌렸으나, 그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방법이나 능력은 동생이 선배였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이런 좋은 기념회를 마련해 주시고 또 동생 부탁대로 슈타이너 자서전인간과 지구의 발달 - 아카샤 기록의 해석을 발간해주신 인지학센터와 이정희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부디 이 책이 인지학을 공부하시는 여러분에게 좋은 밑거름이 되면 좋겠습니다.

평화의 춤이란 축시 낭송은 독일어로 먼저 하고 이어서 이정희 선생님이 번역하신 한국어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주아 기자 anthroposo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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