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학

기사입력 2018.12.18 13:33 조회수 372
댓글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인간학_크라코브2.jpg

크라코브 (통역 여상훈):

“[] 인간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건강한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우선 지난 시간에 다룬 것을 반복하겠습니다. 이 네모 그림은 화가의 캔버스입니다. 그 옆의 작은 것들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물감들입니다. 그리고 화가가 있고 화가의 도구인 붓이 있습니다. 완성된 그림은 이렇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화가가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자신의 그림을 관찰합니다. 관찰하는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 다음에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일정한 과정을 통해서 생각하고 배우는 순서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화실에 한 자연과학자가 들어와서 그림을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과학자 역시 그림에 완전히 집중합니다. 그림을 보면서 여러 물감들이 화학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진 것

인지 관찰합니다. 그리고 캔버스의 구조를 관찰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전 지식으로 상세히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캔버스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물감은 또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그리고

붓의 터치와 물감의 두께 등을 관찰합니다, 이러한 분석 결과를 두꺼운 책으로 쓰게 됩니다.

 자연과학자가 이렇게 분석해도 그림의 본질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분석은 결국 모든 과정이 일어난 후 관찰한 결과를 기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연과학자는 그림의 모티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그림을 마주하여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그는 영혼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그림을 뚫고 들어간다면 그림이 지닌 영혼적이

고 정신적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그림의 영혼적이고 정신적인 것이란 그림을 그린 화가입니다. 화가가 물감을 가지고 영혼적이고 정신적인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가 노력하여 그림으로 들어가 화가를 알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여러 가지 사실에 관심이 없으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과학은 우리를 위해 많은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날 자연과학자들이 인간의 몸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아냈고 몸의 조직을 움직이는 화학작용을 점점 더 많이 밝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동원한 방법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적용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결국 광물 같은 것들을 관찰하기에 적합한 방법입니다. 더 나아간다면 식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방법입니다. 동물까지는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성과들은 인간에 관해서는 정신에 대한 부분에 접근하지 못하고 멈춰버립니다.

 자연과학은 인간을 보이는 형상만으로 과학적으로 정리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자아()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정신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나의 영혼부분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감각을 초월한 것입니다. 신체의 생명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초감각적인 부분입니다. 우리는 초감각적인 것을 느낄 수 있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러한 것을 지각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일반적인 학계에서 그는 혼자만의 상상 속에 있는 인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

 여러분이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은 에테르체나 아스트랄체의 요소들이 신체에 스며 있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자가 이야기하는 물질에 중점을 두고 이 부분을 뒤집어서 생각해 봅시다. 어려운 과정이지만 그것이 필요합니다. 결국 정신적, 영혼적인 존재가 보호막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장갑을 끼고 있는 듯이 말이죠. 우리 본질의 핵인 나(자아)는 에테르체의 옷을 입고 있어서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물질적인 육체와 거의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크기와 모습이 사람과 비슷한 에테르체가 무엇을 만드는지 우리는 알 수 없고, 그것은 신비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제가 말하는 내용은 현대 과학에서 하는 이야기와는 일치할 수 없습니다. 현대 과학은 영혼적인 에테르체와 관련된 요소 또는 아스트랄체와 관련된 요소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림이 보여주는 외형은 우리의 몸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외적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고차적 본질이 사람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관찰할 때 기능과 관계된 조직 체계뿐만 아니라 영혼 작용과 관계된 생각하기(das Denken), 느끼기(das Fühlen), 행동하기(das Wollen)까지 함께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보거나 하는 경우에 다음 세 가지 기본적인 질문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 번째, 내가 무엇을 들었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어떻게 들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나는 어떻게 느꼈는가입니다. 느낌이라는 것은 각자가 서로 다릅니다. 어떤 부분에서 더 많은 것을 느끼는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은 그것을 내가 어떻게 판단하거나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이라고 판단하는가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자기만의 과정으로 만들 수 있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 자신의 방법을 개별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주현 기자 anthroposophy@hanmail.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저작권자ⓒ발도르프 뉴스 & waldorfnew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0
이름
비밀번호
 
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