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교실 수업에 대한 조언

기사입력 2020.02.20 14:08 조회수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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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수업에 대한 조언


김훈태 슈타이너사상연구소



우선 드리고 싶은 말씀은 교사라는 일의 독특한 성격에 대해서입니다. 교사라는 일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직업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제조업에 종사하시는 분들과는 정말로 다를 테고, 같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과도 차이가 큽니다. 물론 IMF 이후 자유주의 문화가 확산되면서 교육을 하나의 상품으로 여기고 교사를 서비스업 종사자처럼 대하는 세태가 생기긴 했습니다. 소비자처럼 교육을 소비하고자 하는 경향이 일부 학생과 학부모에게 어느 정도 존재하는 건 사실 같습니다. 명품학교니 명품교육이니 하는 말로 학교를 홍보하는 분들도 실제로 있었고요. 역으로 교직을 일반 생산직처럼 여기는 선생님들도 계시는 걸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교육은 경제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월급을 받긴 하지만 이 월급은 잘 가르쳤다고 해서 받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는 경제적, 물질적 토대를 사회가 제공해 주는 차원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교육은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작업이지,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영역의 일이 아닙니다. 학생과 교사의 순수하고 인간적인 만남에 교육의 본질이 있습니다. 교사라는 직업이 일반적인 서비스업과 다른 건 그래서입니다.


아이들 앞에 한 명의 어른이 서 있습니다. 아이들이 그 어른, 다시 말해 선생님에게 바라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선생님이 어떤 표정으로,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기 앞에 서 있길 바랄까요? 무표정하거나 낙담한 표정을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웃음을 가볍게 띄고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를 바라봐 주길 원할 겁니다. 두려움 없이 당당한 모습, 자신감 있는 모습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나아가 아이들은 존경할 만한 어른을 원합니다.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완벽하지 못한 것을 늘 인식하고 성장하려는 존재가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선생님의 속사정까지 고려하고 배려해 줄 정도로 어른스럽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감기에 걸렸든 숙취에 시달리든 상관하지 않지요. 그게 아이다운 모습입니다. 집안에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아이들 앞에 설 때는 밝은 모습으로 수업을 이끌어가야 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마치 무대 위에 선 가수가 활기 찬 모습을 보여 주는 것처럼요. 쉽지 않은 일인 건 알지만 교사로서 노력해야 할 지점임은 분명합니다.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건 단지 표정뿐이 아닙니다. 수업 준비를 나름대로 한 방향으로 충실히 해왔다 해도 그날의 아이들 컨디션이나 성향에 맞게 수업내용을 변화시켜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생각해 보면 교육의 내용이나 방법이 그 대상에 맞춰져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교사는 아이들의 발달단계와 기질적 특성, 아이들 저마다의 개별적 특성을 고려해 수업을 준비하고, 수업이 시작되면 최대한 그 순간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수업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유연해야 하고 창조적인 힘도 발휘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사고방식이 경직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설적인 원칙이긴 한데, 교사로서는 '자기 중심'이 확고하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을 확고히 세운다는 것은 교사로서 분명한 원칙과 소신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원칙이 명확할 때 유연할 수 있습니다. 원칙이 불명확한 경우 그저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타인을 바라보듯 객관화해서 보는 것이고, 책임의식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원칙이 경직되지 않을 수 있고, 자연스럽게 순리를 따를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사고가 경직되지 않게 하려면 판타지 능력을 키우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것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이기도 한데요, 좋은 이야기를 많이 읽고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보는 게 큰 도움이 됩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배움의 욕구가 있습니다.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배워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이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는 배움 자체가 큰 기쁨이기도 하고요. 아이들에게 수업내용은 뭔가 친숙하면서도 신기하고, 알고 싶은 무언가여야 합니다. 그런데 수업이 교과서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진도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컴퓨터 프로그램을 따라가는 식이 되면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가르치는 교사도 흥미가 없을 것입니다. 교사도 좋아하지 않는 수업을 아이들이 좋아할 리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과서 내용이 아니라 학습목표, 즉 수업의 주제입니다. 만약 "공공장소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말하기"라는 주제의 수업을 한다면, 교과서에 제시된 지문을 읽고, (대부분 이미 정해진) 답을 하기 위해 손을 들고, 상투적인 문항에 답을 적어넣는 정도의 활동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흥미를 주지 못합니다. TV로 재미있는 동영상이나 사진을 제시한다 해도 그때뿐이며 아이들은 점점 지루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몇몇 아이들은 재미없다고 투덜대기도 하고 딴짓을 하며 장난을 치다가 혼이 날 수 있겠지요. 교실에 컴퓨터와 TV가 들어오고, 수업 프로그램이 교사의 역할을 대신하는 현상은 상당히 심각한 일입니다. 아이들은 교사와 눈을 맞추고 싶고, 살아 있는 수업에 빠져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때 교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이 주제를 왜 하는지 명확한 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공장소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말하기"라는 주제가 이 아이들에게 왜 필요한지 정확한 이해가 없이 '교과서에 있으니까 그냥 한다'는 정도라면 아이들을 납득시키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묻습니다. '그런데 이거 왜 해요?' 좀 깬 아이들은 시니컬하게 물을 수도 있겠지요. 아이들의 그런 질문에 다 답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교사가 자기만의 명확한 답이 있고 없고에 따라 수업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활동의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이제 주제를 아이들의 삶과 연결시킬 차례입니다. 교과서의 지문은 대체로 정치적으로 올바를 뿐 생동감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실제로 도서관이나 지하철, 미술관 등에 갔을 때 어떻게 행동했고 말했는지를 교실에 가져와야 합니다. 연극적인 작업으로 문제가 되는 말과 행동을 직접 해보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시연해 보도록 하면 아이들은 흥미를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활동에 대해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들었는지 이야기 나눕니다. 주관적으로도 생각해 보고, 객관적으로도 관찰해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저마다 올바른 게 무엇인지 파악할 것이고, 올바르게 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갖게 될 것입니다. 교사는 이런 활동을 구조화해 주고, 중요한 포인트를 반복해서 강조하면 됩니다.


교실 수업에서 수업내용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집중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수업이 시작될 때는 아이들의 주의력이 흐트러질 만한 상황을 모두 통제해서 정돈된 상태에서 출발하는 게 좋습니다. 출입문을 닫지 않았다든지, 바닥에 물건이 떨어져 있거나 책상 배열이 흐트러져 있다면 확인하고 준비된 다음에 시작합니다. 교실에 벌레가 들어와 있다면 즉시 처리를 해야 수업 내내 집중할 수 있습니다. 수업을 시작할 때 함께 노래를 하거나 간단한 악기 연주를 들려 준다면 더 마음이 잘 모아지겠지요. 이것은 모두 교사의 권위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는데, 교사가 교실 전체를 장악하지 못하면 아이들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집중을 못하고 장난을 친다거나 지루해 한다면 그것은 아이들 탓을 할 문제가 아니라 교사와 부모가 어떤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는지 돌아볼 문제입니다. 아이들은 환경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 존재이고, 주변환경의 영향에 따라 인격이 형성되어 가는 중입니다. 아이들 중 몇이 수업에 전혀 들어오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다면, 교사는 그런 일 자체가 벌어지지 않도록 환경(물리적 환경 및 약속, 수업방식, 교사의 권위 등)을 개선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본격적인 수업에서는 말썽을 부리는 몇몇 아이들과 싸우기보다 열심히 잘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더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시기의 아이들에게 교사의 권위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교사의 건강한 권위를 믿고 의지하며 배우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학년이 되어가면 사춘기적 징후가 나오며 저항을 할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아이들은 든든한 외적 권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권위, 다시 말해 내적 권위를 키워갈 준비를 합니다. 중등학교에서 교사는 이 내적 권위를 추구하는 데 골몰하는 아이들을 위해 이따금 친구처럼 편하게 대할 수도 있고, 유머와 전문성을 오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초등 시기의 교사는 친절하면서도 단호한, 권위 있는 어른으로 서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사는 교실 공간을 장악해야 합니다. 억압이 아니라 적절한 통제입니다. 그만한 힘이 있으려면 교사 스스로 내적 권위가 강하게 서야 합니다. 스스로 해답이 있고 자신감이 있는 상태입니다. 교사 스스로 자기 자신을 믿고 힘차게 나갈 때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힘을 실어줄 것입니다. 교사를 계속 힘들게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사실 무언가를 요청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요청인지는 교직 내내 교사가 찾아가야 할 숙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말씀을 드렸지만, 마무리하자면 교사라는 직업은 굉장히 특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교육은 단순히 책의 내용을 나열하거나 동영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인간적으로 만나는 과정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야 할 것은 아이들은 어떤 존재이고, 교사 자신은 누구인가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개념이 '의미'와 '성장'입니다. 이런 만남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고,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교사는 알아야 합니다. 아니, 알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잠에 빠져들지 않고 깨어날 수 있습니다. 교사라는 직업은 그 특수성 상 아이들과의 만남 그 자체, 수업 그 자체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지 않으면 점점 슬럼프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행인 건 아이들이 교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그것이 종종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의 성장을 위해 주어지는 선물과도 같습니다. 교육을 하나의 예술로 볼 수 있다면, 모든 예술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고통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돌아봐야 합니다. 피아노 연주자가 오로지 기쁨 속에서만 연주를 준비하고 공연하지는 않겠지요. 정말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일 테고요. 교사의 성장을 보고 아이들은 조금씩 성장하는 법이니, 교사라는 일은 정말 속이 썩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점을 바꾸면 정말 기쁜 일이기도 하지요.


말로는 참 쉽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선생님들이 겪어야 할 고통과 참담함은 기쁨과 즐거움 못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아이들을 만나러 가시는 선생님들을 응원합니다. 선하고 참된 뜻을 갖고 아이들을 만나는 선생님들을 위해 늘 따뜻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발도르프 뉴스 기자 anthroposo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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